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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1월 29일 금요일

아직 사랑하지 않은 당신에게.

아직 사랑하지 않은 당신에게.

 당신은 나를 만나러 당진에서 왔습니다. 그 멀리에서 오느라 고생했겠다 말하는 나에게, 당신은 당진이 버스타면 곰방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당신은 아직 갈 데가 없어 동생네 집에 있다면서, 그 머물러 있지 않음을, 그 평온하지 않은 상태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습니다. 후에 안 것이지만 당신은 그런 사람인 것 같습니다.

 당신은 높은 사다리 위에 올라탄 나를 지탱하기 위해 힘을 주어 사다리를 붙들고 있다가 바닥에 떨어졌을 때에도, 별수롭지 않게 일어났습니다. 당신이 담배를 빨고 내뱉을 때, 온 근심을 다 떠안은 것 같다가도 이내 발랄한 목소리로 나를 일으킵니다. 당신은 알다가도 모를 만큼 무겁다가도 가볍게 자신을 세상에 내던지는 것 같습니다.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시린 겨울이었습니다. 당신은 눈시울을 잠시 붉히며 나의 노래에서 당신의 어머니의 부재를 느껴 슬퍼졌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따뜻한 털모자가 당신 끝에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었습니다.

 다시 당신을 만났을 때, 당신은 가벼운 외투를 걸치고 여름 끝을 놓으려 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바알갛게 물이든 합정에서, 우리는 잠시 선유도에 갈까 망설였습니다. 선유도에 닿으면 노을이 다 저버렸을 것이라 여겨 우리는 다른 곳으로 향했습니다.

 우리는 고작 삼개월을 드문 드문 만났지만, 나는 오랫동안 당신을 알던 사람처럼 당신의 허락도 받지 않고 당신 어깨에 손을 얹기도 하고, 당신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리기도 하고, 괜히 어리광을 피우거나, 무례한 부탁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크게 반기지 않는 것으로, 거절을 대신 하지 않았나 생각했지요.

 당신은 섬에서 태어나, 육지로 나와 학교를 다녔다고 했습니다. 나는 육지에서 태어나 지금은 섬에서 살고 있습니다. 평생을 다른 곳에서, 다른 냄새, 다른 사람들을 겪으며 살아왔는데, 이순간 그래도 당신과 닿게 되어 나는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당신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강건하고 무심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어쩌면 작은 상처에 조바심내 하고, 잘 울기도 하고, 소심한 마음을 감추려는 내성적인 사람일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튼튼한 내면을 가지고 있다는 관찰을 서둘러 바꾸지 않겠습니다.

 나는 우리가 덥고 습기찬 여름의 끝자락에서 만나 첫눈을 기다리는 쌀쌀한 겨울에 온 것이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함께 침대를 끌고 온시내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당신은 베개와 이불을 짊어지고, 때로는 침대를 끌고 내 앞으로 왔습니다. 당신은 변두리의 폐교에서, 서둘러 이사를 떠난 빈집에서, 누군가의 감나무 아래에서, 검은 도로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 그리고 습기찬 선유도에서 나를 만났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런 마음조차 처음, 짧은 기간 동안만 가능한 감정인 것 같아, 아깝고 아쉽습니다. 당신앞에 놓인 삶이, 너무 무겁지 않기를, 조금 무거울 때 내가 함께 들어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을아직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만남이 끝날 때까지, ‘아직이란 말로 미처 시작하지 않은 말들을, 오래 머물지 않는 처소를, 가보지 않은 당진행 버스표와 함께 묻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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